명당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좋은 터’다. 풍수지리는 사람이 사는 터(양택)의 좋고 나쁨을 가릴 때, 터의 지형(局勢라고도 한다). 지세를 살펴보고, 그 집에서 살았던 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확인해 어떤 터가 명당이고, 흉당인지를 판단하면서 발전해 왔다. 그렇다면 청와대 터를 풍수적으로 분석하고 그곳을 거쳐 간 전직 대통령들의 삶을 통해 그 터에 문제가 있었는지, 사람이 문제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까?
역대 대통령들은 국민의 선택을 받고 청와대에 입성했으나 박수받고 떠난 분이 없었다. 특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탄핵을 받아 임기를 못 채우고 청와대를 떠난 후 20일 만에 구속됐다.
이처럼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퇴임 후는 하나같이 불행했는데, 공교롭게도 일제 강점기 청와대 터에서 지냈던 조선 총독들의 삶도 예외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청와대 터는 조선총독부 관사로 시작해 해방 후 이승만, 윤보선,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등 12명의 대통령이 취임하고 머물렀지만, 단 한 사람도 존경받으며 임기를 마친 사람이 없었으니 이게 무슨 조화인가?
혹자들은 인공지능(AI)이 논문도 써 주고, 판결문까지 써 주는 첨단 과학 시대에 웬 풍수 타령이냐고 반문하겠지만, 풍수지리는 첨단 과학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전통 자연과학이다. 따라서 풍수적으로 판단하면 ‘청와대는 사람보다도 터에 문제가 있었다’고 본다.
청와대 터의 역사
청와대 터에 대한 역사는 깊어 고려 숙종 9년(1104년)에 완성된 남경(南京)의 이궁(離宮) 자리가 현 청와대 터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할 때 신하들이 “고려 숙종 때 이룩한 궁궐터는 너무 좁으며 그 남쪽의 넓은 터가 명당”이라고 건의한 이후 태조 4년(1395년)에 청와대 남쪽에 정궁(正宮)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청와대 터는 그 후원(後園)으로 사용됐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전소됐다가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후부터 청와대 터에 오운각, 중일각 등 건물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청와대 터가 처음으로 시련에 부닥친 것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하면서부터다.
일제는 바로 그 이듬해에 경복궁 앞을 조선총독부 청사부지(옛 국립중앙박물관)로 정했으며 오운각(五雲閣) 등 각종 누각을 철거하고, 1939년 청와대 구 본관 자리에 조선총독부 관저가 들어섰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면서 서울에 입성한 일제는 경복궁 터에 총독부와 관저를 세웠지만, 겨우 6년 만에 패망해 한반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특히 총독부 관저에서 살면서 조선을 통치했던 미나미 지로(7대), 고이소 구니아키(8대), 아베 노부유키(9대) 등 역대 총독도 일본으로 돌아간 뒤 전범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거나, 정적에게 제거되거나, 일찍 죽는 등 말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이 총독부 관저를 관사로 이용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비로소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이곳을 ‘경무대(景武臺)’로 명명하고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했다.
원래 경무대는 고종이 재위 5년인 1868년 현재의 청와대 터를 경복궁 후원으로 복원하면서 과거장과 제천(祭天) 행사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던 건물 이름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후 윤보선 전 대통령 시절에 지붕이 푸른 기와로 돼 있었기 때문에 ‘청와대’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본관 건물 이전
6공 시절인 1991년 7월 노태우 전 대통령은 총독부 관저였던 청와대 옛 본관 건물에서 지금의 청와대 본관으로 이사했는데, 옛(본관) 건물이 협소해 넉넉한 공간이 필요하다는 실용적 이유 외 풍수적 사항도 고려됐다(당시 풍수지리로 이름을 날렸던 하남 장용득 선생도 풍수 자문을 했다고 전해짐).
즉, 일제가 조선왕조와 민족의 정기를 억누르려고 사람의 목에 해당하는 자리에 조선총독부 관사를 지었으므로 그 숨통을 트려면 옛 청와대 자리를 헐고 다른 곳에 지어야 한다는 것이 풍수적 이유였다. 실제로 청와대의 새 건물은 북악산 정상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경복궁-광화문-관악산을 향하는 정남 축 선상의 해발 70m 지점에 세워져 있어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풍수적 이치를 따져 건축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대통령의 비극
광복 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처음 청와대에 입성한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유시장경제 정책의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소작농들을 위해 토지개혁을 했으며 6년간 의무교육으로 문맹을 퇴치했다.
또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을 저지했으며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북한의 남침을 원천 봉쇄해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매진할 수 있게 되는 등 과(過)보다 공이 훨씬 많았지만, 1960년 4·19 혁명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하와이로 망명 중 서거했다.
‘건국 대통령’이라는 호칭보다는 ‘독재정권’의 상징으로 불렸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뒤를 이은 윤보선 전 대통령은 재임 1년 만에 군사정권에 의해 청와대에서 쫓겨났다.
그 후 5·16 쿠데타로 청와대에 입성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조총련계 문세광의 총탄에 잃었다. 4년 뒤 자신도 부하의 총에 시해되는 비극을 맞았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잠시 대통령이 됐다가 전두환 군부 세력에 쫓겨났다. 5공 청문회 출석과 증언을 거부해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치고 청와대에서 나왔으나 ‘5공 청문회’에서 망신을 당했다. 재임 시절 비리 문제로 구속됐고, 수천억 원의 추징금이 부과됐으며 ‘부정 축재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 뒤를 이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의 실현,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등 많은 업적을 남겼음에도 IMF 사태와 재임 중 자식의 구속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 조기 졸업 등 공이 적지 않았으나 자식 셋이 비리에 연루돼 ‘홍삼 트리오’라는 치욕적인 이름을 얻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박연차 스캔들’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명박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의 비리 혐의로 구속됐다가 상당한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구설수가 많아 앞길이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청와대를 거쳐 간 전직 대통령들은 단 한 사람도 순탄하지 못했는데 왜 그럴까? 필자는 그 이유를 청와대 터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청와대 터는 왜 나쁜가?
풍수지리 원전인 청오경(靑烏經)에 5대 ‘불가 장지(不可 葬地)’라는 말이 있는데 현대 풍수에서도 이 격언을 중요시하고 있다. 아래의 다섯 가지에 해당하는 터는 흉지이므로 묘를 쓰거나 집을 짓지 말라고 했다.
동산(童山)에 묘 쓰지 말라
동산이란 풍화작용이 끝나지 않아 바위와 토질이 거칠고 설기 된 땅을 말하는데, 이런 곳은 생기가 오지 않아 묘지나 집터로 금하는 땅이다.
독산(獨山)에 묘 쓰지 말라
독산이란 홀로 외로이 떨어진 산으로서 생기가 이동하는 맥로와 바람을 막아주는 호종사가 없어 터를 보호받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집터나 묘 터로 금하는 땅이다.
석산(石山)에 묘 쓰지 말라
석산이란 바위산을 말하고, 바위산은 생기의 이동을 차단하고 강한 독기(毒氣)만 뿜어내기 때문에 바위 가까이는 묘를 쓰거나 집 짓는 것을 금하고 있다. 특히 청와대 터는 거대한 바위산인 북악산 아래에 있어 생기가 오지 않는 무맥지 이고, 밤이면 강한 음기와 독성을 내 뿜고 있다고 판단되므로 그곳의 주인은 독선과 아집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과산(過山)에 묘 쓰지 말라
과산이란 생기가 명당 혈로 가기 위해 지나가는 길(脈路: 산줄기)을 말하고, 대부분의 맥로는 높은 곳에 있거나 바람이 치는 곳에 있어서 기(氣)를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에 묘 터나 집터로 적합하지 못하다. 예컨대 국립 현충원의 박 대통령. 육 여사 묘터는 현충원에서 유일한 명당인 창빈 안씨 묘로 생기가 지나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과산(過山)이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 터와 집무실에 대한 풍수지리적 판단
청와대 터는 해발 70m에 자리해 경내에 들어가 보면 서울 시내가 발아래에 펼쳐져 있다. 그 모양은 마치 왕이 용상에서 명당(신하들이 황제나 임금 앞에서 조회 받는 곳)을 내려다보는 격으로써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 된 나라의 대통령 집무실로는 적합하지 않다.
특히 양택풍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주산(북악산)의 면, 배 여부(면산에 기가 흐른다)와 생기(生氣)가 축장 된 혈처(穴處)에 집을 짓는 일이다. 우선 주 산인 북악산(342m)은 혜화동 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형국(고개를 숙이는 쪽이 면이다)으로써 청와대는 면산(面山)에 자리했다고 볼 수 없다.
또 한양 도성으로 오는 생기맥은 백두대간 추가령에서 한북정맥으로 갈리어 포천 운악산, OB 베어스타운 뒷산, 축석고개, 의정부, 도봉산, 북한산, 보현봉 아래에서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을 지나 경복궁으로 오던 중 맥로(脈路)는 북악산 바위에 막혀 청운대에 앞에서 경복궁으로 향하다가 교태전에서 회전하면서 멈추기 때문에 교태전이 경복궁의 한북정맥의 주혈 명당이다.
그러므로 청와대 터를 풍수지리적으로 해석하면 무해무득지도 되지 못하는, 흉지에 가까운 터다. 이것은 조선이 개국하면서 북악산의 살(殺)을 피해 약 600~700m 떨어진 곳에 경복궁의 주 건물인 교태전, 강녕전, 근정전 등 주요 전각을 지었으며 특히 명당 혈처인 교태전에 왕과 왕비의 침실을 조성한 이유는 풍수지리 원칙(명당 발복)을 적용했기 때문으로 본다.
그러나 많은 풍수인은 풍수지리학에서 가장 핵심인 생기맥(生氣脈)의 출맥처(出脈處)나 향방 및 결혈지를 도외시하고 청와대 터가 길지(吉地)인지, 흉지(凶地)인지, 흉지라면 왜 흉지인지를 잘 모르면서 갑론을박하고 있는 현실이다.
대통령 관저
청와대가 개방돼 대통령 집무실 외 관저도 볼 수 있지만, 외부에서 건물을 한 바퀴 돌면서 뒤편 창문으로 내부를 보는 것이 전부다. 관저는 춘추관 뒤로 올라가 북악산 언덕배기에 규중 궁궐처럼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관저 터’는 석산을 절개해서 들어내고, 앞마당엔 높은 석축을 쌓고 터를 늘려 생기(生氣)의 유입 등 풍수지리는 고려하지 않고 산 쪽으로 바싹 붙여서 건축했기 때문에 석산과 급경사에 대한 탈살(脫殺)을 하지 못했고, 수맥도 피하지 못하는 등 풍수적으로 문제가 많다. 특히 대통령 일가족이 단독으로 생활하기엔 턱없이 넓고, 음습한 느낌이 든다. 일국의 대통령도 인간일진대 이런 터는 거주자 수에 비해 건물이 너무 커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대통령 관저를 넓고, 크고 위엄있게 조성하려다 보니 풍수지리적 요소를 무시하고, 건물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 지은 것은 이곳을 다녀간 역대 대통령들이 민심에 귀를 닫고 고집불통으로 지내다가 말년이 불행해진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윤석열 대통령이 풍수 전문가의 자문을 받았는지를 떠나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고 관저를 한남동으로 옮긴 것은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