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스타트업과 테크의 축제, 비바 테크 2024의 슬로건은 ‘Reduce! Reuse! Recycle!’. ‘절약, 재사용, 재활용’이 테크 박람회의 슬로건이라니 참 색다르다. 지금 비즈니스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일까? 매일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공지능(AI)의 발전, 가속하는 온난화와 이상기후, 예측 불가능한 세계 정세 속 갈수록 중요해지는 지속성의 개념, 인구 감소에 따른 생산성 등이 아닐까 예상해 본다.
이러한 이슈가 ‘사업’과 ‘테크’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그 다양한 물음에 관한 고찰을 비바 테크 2024에서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해결책과 새로운 혁신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을 들여다본다.
화려한 부스 디자인과 볼거리로 치열한 경쟁이 가득한 비바 테크의 회장에서 혁신과 새로움을 강조한 기획 부스가 많은 이목을 끌었다. 2024년 에디션에서 주최 측이 내세우는 혁신, 친환경, 지속성의 메시지를 몸소 실천하는 기업이 선정된 기획전들이었다.
비바 테크에서 선정한 ‘지금 주목해야 할 스타트업 10선’에서는 이 기획전에 참여한 기업이 여럿 소개됐다.
개중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은 곳은 EDF 등 대형 그룹의 벤처 사업부터 업력 3년 정도의 스타트업까지 참여한 ‘임팩트 브리지(Impact Bridge)’와 AI 업계의 촉망받는 다양한 기업을 엄선한 ‘AI 에비뉴’ (AI Avenue)였다.
임팩트 브리지는 특히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기술력, 제품에 포커스를 맞춘 기획전이었다. 프랑스 전력 공사 EDF가 메인 스폰서로 기획된 이 구역은 스타트업 관련 협회 단체와 테크·제품 시연장, 파트너·투자자 스페이스, ‘해커톤’(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및 기술에 일반적인 관심이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코딩으로 소규모 제품을 만드는 행사) 존으로 다양한 프로그램과 구역을 선보였다.
참여 기업을 알아가는 것은 물론 파트너십과 투자 유치, 그리고 개발자들의 만남과 소통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기획과 구성이다. 일례로 임팩트 브리지에 참여한 기업 디오니머(Dionymer)는 유기폐기물을 생분해성 고분자 재료(PHA)로 전환하는 솔루션을 제공하는데, 석유화학 플라스틱을 대체하고 자연에서 영감받아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바이오 폐기물의 비용을 줄이는 것을 모토로 한다.
AI 에비뉴는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다수의 스타트업 셀렉션이 돋보였는데, 분석형과 생성형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눈에 띄었다. 흥미롭게도 예술과 문화 콘텐츠를 다루는 기업도 다수 볼 수 있었다.
특히 회장의 입구에서부터 중앙까지, 유동 인구가 가장 많은 길목에 배치해 현재 AI가 얼마나 테크와 스타트업계에서 중요한지 상기시키는 듯했다.
AI에비뉴의 한 기업 옥시아 플러스(Oxia Plus)는 분광 이미징, 인공지능 및 3D 프린팅을 결합해 손상된 예술 작품을 재창조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의 ‘두 명의 레슬러’와 같이 기존 그림 아래 숨겨진 많은 정보(밑그림·물감 흔적 등)를 발견하는 데도 한몫한다.
4일에 걸친 일정 중 비바 테크의 행사장은 글로벌 또는 유럽 대륙 규모의 큰 발표와 론칭 소식으로도 가득했다. 50여 개의 중요 발표 중 일부를 정리해 보았다.
• 바이페드AI(BiPed AI):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개발된 로봇 소프트웨어. 장애물 인식 기능, 턴바이턴 내비게이션과 GPT를 이용한 풍경 묘사를 적용해 이동성을 확대화
• 바이오테오스(Bioteos): 생물 자극제와 미세조류를 탑재해 3D프린팅으로 제작한 실내용 공기 청정기
• 도파비젼(Dopavision): 신경·안과 질환자를 위한 새로운 치료 솔루션으로 사각을 타겟팅한 고유의 광생물 조절 치료법 고안
• 테슬라(Tesla): 신종 차량 사이버트럭(Cybertruck)이 비바테크를 계기로 프랑스에 처음 선보였으며 이후 프랑스와 유럽 투어 기획
·
박람회 일정을 기획함과 동시에 비바 테크 운영국은 매해 다양한 리포트와 자료를 발행한다. ‘2024년 차기 유니콘 기업 100선’ 리포트에 따르면 차세대 유니콘 기업은 총 16개국에서 배출했으며 약 170억 유로(한화 약 25조 원)의 투자를 확보했다.
(이는 전년 대비 늘어난 수치이다) 이 리포트에 이름을 올린 스타트업 중 약 3분의 1이 2019년과 2023년 사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한다. 일례로 2023년 통계에 선정된 핀테크 스타트업 페니레인(Pennylane)은 올해 접어들어 유니콘 타이틀을 걸었다.
리포트에 가장 많은 기업을 배출한 국가는 영국(22개), 프랑스(21개), 독일(14개)이다. 가장 대표적인 산업군으로 SaaS(43개), 디지털 미디어(16개), AI·빅데이터(16개)로 나타났다.
스타트업계에서 여전히 SaaS(Software as a Service: 소프트웨어를 서비스로 제공하는 형태)가 강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AI 분야가 톱 산업군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소식이다.
이 통계에 대해 비바 테크의 프랑수아 비투제 상무이사는 “이 리포트는 유럽 스타트업계의 생태계를 파악하는 지표의 역할을 한다. 2024년 접어들어 SaaS와 AI의 성장이 특히 매우 돋보인다”고 남겼다. “미국과 아시아권 기업들에 대항해 경쟁력을 키우는 동시에 유럽권 기업들이 제공하는 새로운 접근법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또 사업적으로나 친환경 면으로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고안하는 것이 주요 과제”라고 덧붙였다.
비바 테크 참가 기업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은 메인 파트너이자 스폰서인 LVMH 그룹일 것이다. LVMH 그룹은 벤처 스타트업 프로그램인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의 이름을 딴 시상식을 주최하는데, 이는 매년 비바 테크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로 꼽힌다.
오픈 이노베이션 상은 그룹에 인큐베이팅과 액셀러레이팅을 진행하는 스타트업 중에서 선정된다. 가장 혁신적이고 현재 트렌드에 앞선 기업이 대상을 가져가게 된다.
그룹의 명성만큼이나 이 시상식은 미디어와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며 7가지 부문 수상 기업은 모두 LVMH 그룹과 산하 브랜드와 협업 기회라는 어마어마한 혜택을 누린다.
시상식은 비바 테크에 마련된 대형 무대 중 한 곳에서 그룹 관계자와 후보에 오른 스타트업과 그 스태프를 초대하고 입장객을 제한한 프라이빗 이벤트로 진행된다. 시상식은 회장 내 LVMH 부스에 마련된 모니터에서 동시 송출되는데, 덕분에 LVMH 부스는 더더욱 성황을 이뤘다. 부스에 배치된 모니터와 작은 객석에 관람객들이 빽빽이 모여들었다.
LVMH의 이노베이션 상은 총 7가지 부문이 있다.
• 브랜드 선호도를 위한 이미지·미디어: 수상자 이르캄 앰플리파이
• 지속 가능성 및 그린테크: 수상자 엑츄얼
• 몰입형 디지털 경험: 수상자 펜시테크
• 옴니채널 및 소매: 수상자 글렌서블
• 운영 우수성: 수상자 어테나
• 직원 경험, 다양성 및 포용성: 수상자 헤럴보니
• 데이터, AI·생성형AI 솔루션: 수상자 블링
치열한 공방 끝에 대상은 생성형 AI 기반 영상 콘텐츠 제작 플랫폼 펜시테크의 품에 안겼다. CEO 모건 마오에게 직접 트로피를 전달한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LVMH 이노베이션 대상자로서 펜시테크는 LVMH의 그랑프리 수상자들의 독점적인 서클에 합류하게 됐다.
이는 우리 브랜드와 협력해 럭셔리 부문의 변화를 이끌어갈 기회이며 이 상은 기술 발전을 활용해 탁월성을 높이는 스타트업을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의 전문성이 그룹의 비전과 일치하고 고객들의 기대를 앞서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스타트업계의 최고의 스폰서이자 리더를 자처하는 LVMH그룹에서 인정받는 가장 유망한 비즈니스로서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기업이 선정된 것은 무척이나 큰 의미를 지닌다. 이로써 명실상부 AI는 스타트업과 테크업계를 지배하는 가장 핫한 트렌드이자 가장 중요한 과제로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비바 테크 2024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CES와 같은 다른 테크 박람회와 분명한 차별점을 두고 있다. 기술과 혁신에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고 사업과 투자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포맷은 그대로다. 하지만 프랑스식 정서와 유럽적인 성격을 더해 윤리와 철학, 친환경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시행착오도 볼 수 있었다. 수백 개 기업이 업력과 크기를 불문하고 한데 모여 지금까지 이루어온 것, 앞으로 이룰 것들, 앞으로 그려질 미래의 모습, 그 미래를 위해 이루어져야 할 것을 고찰한다. 이 현상이 우리나라 기업에도 긍정적인 바람을 몰고 오기를 바라본다. 유지선 프랑스 특파원